윗트니스 리의 저서 : 에스겔의 이상

제 1 장  머 리 말

성경 :에스겔 1:1-3, 민수기 4:2-3, 역대상 23:3상, 누가복음 3:23상, 에스겔 40:17, 41:6상, 민수기 8:24, 창세기 11:1-9, 31

하나님의 목적

에스겔서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창세기 1장부터 3장에 계시된 그림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들 세 장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를 생명나무 앞에 두셨다. 생명나무는 음식의 형태로 우리에게 생명 되시는 하나님 자신을 상징한다. 사람의 타락 때문에, 생명나무는 감추인 바 되었고 그룹에 의해 둘러싸여졌다. 생명나무는 감추어졌고 둘러싸여졌을 뿐 아니라, 화염검이 그 나무에 이르는 길을 차단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생명나무를 자신의 양식으로 취할 수 있도록 그것에 가까이 접근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주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그분이 생명의 떡으로 오셨다는 것과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음식으로 취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분은 말씀하시기를, 『나를 먹는 그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 6 :57)고 하셨다.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음식으로 취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의 생명과 그분의 본성을 갖게 될 것이며, 결국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분의 생명과 본성과 형상을 가짐으로써 우리 모두는 함께 건축될 것이다. 요한복음 17장 21절에서 주 예수님은 『저희도 다 하나가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셨다.

주님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그분은 우리 모두가 함께 건축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요한복음에서 요한 계시록으로 나아갈 때, 구속된 모든이들이 하나의 성(城)으로 함께 건축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성 안에서 우리 모두는 단지 말이나 교리만으로가 아니라 건축에 있어서 하나인 것이다. 반드시 우리는 서로 생명 안에서 건축되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은 하나의 성 예루살렘을 갖게 되실 것이다. 에스겔서는 우리에게 바로 그같은 것을 밝혀 주고 있다. 제 1장에는 타오르는 불의 그룹들이 있는데 그들 가운데는 하나님이 계신다. 기타 장들은 어떻게 그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가를 보여 준다(11,33,34,36,37,47장). 결국에 가서 48장은 그분의 생명을 가진 우리들이 모두 함께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건축될 것을 말해 준다. 이같이 우리는 에스겔서가 온 성경의 축소형 임을 볼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뜻이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데, 이는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생명으로 갖기 위함이요 그분의 성품을 갖기 위함이다. 그분의 신성한 성품을 받음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영광 스러운 형상을 지닐 수 있게 된다. 결국 우리는 두 본성을 가진 하나의 실체로서 하나님과 함께 연합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거처로서 함께 건축될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 분명히 계시된 하나님의 영 원한 목적이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과 에스겔서 모두가 계시하는 바는 우리가 그분의 신성한 본성을 갖고 그분의 영광스런 형상을 지니도록 그분 자신을 다만 우리 안에 생명으로 분배하시는 것이 하 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럴 때 신성한 본성과 신성한 형상에 의해서 우리 모두는 하나의 영원한 거처-새 예루살렘-로 함께 건축될 것이다.

계시록과 유사함

에스겔서와 계시록은 공통점이 매우 많다. 사실 이 두 책의 주요 요점들은 거의 같다. 에스겔과 사도 요한은 둘 다 이상(理想)들을 보았고, 두 책은 그들이 본 이상들로 시작한다. 만일 이 두 책이 없다면, 성경이 우리 에게 생명에 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겠지만, 생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이해하기는 곤란할 것이다. 이들 두 책은 비단 생명이라는 용어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무엇이 생명이고 또 어떻게 생명이 우리 속에서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는지를 묘사하는 이상들도 갖고 있다. 이들 이상들에 의해서 우리는 사실상 생명에 속한 무엇을 볼 수 있다. 본서에 담긴 메시지들은 이들 이상들의 예언적 측면에 대한 해석이 아니고, 생명에 따른 그것들의 영적 의미에 대한 적용이다.

이 두 책은 모두 생명수 강의 흐름을 보여 주고 있다. 에스겔서 47장에서 하나님의 처소로부터 강이 흘러나온다. 또 계시록 22장에서도 생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다. 이같이 에스겔서와 계시록 모두에서 하나의 강이 생명 공급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온다. 두 책 모두 예루살렘의 이상을 보여 주고 있다. 에스겔서는 예루살렘에 대한 이상으로 끝나며 계시록 역시 그렇다. 더욱이 이들 두 책은 하나님의 의도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신성한 본성과 그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갖도록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것임을 말해준다. 그럴 때 그분을 우리의 생명으로 가짐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신성한 본성과 영광스러운 형상 안에서 거룩한 성(城)으로 함께 건축되어 영원토록 하나님의 거처가 될 것이다.

에스겔서의 네 부문

에스겔서는 이상들에 대한 책이다. 에스겔서의 첫째 부문인 1장 전체는 주님의 영광의 모습에 대한 이상을 제시해 준다. 그것은 어떻게 하나님이 나타나시며, 어떻게 하나님이 움직이시며, 또 어떻게 하나님이 네 생물을 통해 그분의 통치를 행하시는가를 계시해 준다. 그들의 협력으로 하나님은 움직이시며 통치하실 수 있다. 두번째 부문-2장부터 32장-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과 이방 나라들을 심판하기 위해 소멸시키는 불로서 오신다. 심판 후에 하나님은 생명으로써 그분의 백성을 회복하시러 오신다. 회복의 부문인 세번째 부문은 33장에서 시작되어 39장까지 계속된다. 네번째 부문은 하나님의 거룩한 건축에 관한 것인데, 생명에 의한 회복으로 비롯되어 에스겔서 전체를 결론 짓는다. 이같이 에스겔서는 주의 영광의 모습으로 시작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건축으로 끝난다. 이것은 하나님의 목표와 목적이 건축임을 가리킨다.

에스겔서의 서문

이제 우리는 에스겔서의 처음 세 구절을 보자. 이 구절들은 책의 내용을 우리에게 열어 주는 서문이다. 그것은 매우 특별하고 특정하며 독특한 서문이다. 성경 육십 육 권은 각 권마다 독특하게 시작된다. 예컨대, 창세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마태복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에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리라』로 시작한다. 에스겔서는 겉으로 볼때 의미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시작한다. 그럼 이 세 구절을 읽어 보자. 『제 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이 내게 보이시니 여호야긴왕의 사로잡힌 지 오 년 그 달 오일이라 갈대아 땅 그발 강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손(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이 구절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제 삼십년은 무슨 뜻이고, 사월은 무슨 뜻이며, 그 달의 오일은 무슨 뜻인가? 겉보기에 이 세 구절들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들 서문의 짧은 세 구절들에서 네 가지 주요한 것이 다루어졌다. 이것은 이상의 책이므로 이 세 구절은 먼저 에스겔이 이상들을 본 해(年)와 달과 날을 보여 준다. 둘째, 이 구절들은 또 그가 이상들을 본 장소를 보여 준다. 세째, 그것은 그 이상들을 본 사람을 보여 준다. 네째, 그것은 이상이 보였을 때의 상태와 상황을 우리에게 시사해 준다. 이같이 이 짧은 서문은 이상이 보였을 때의 시기와 장소와 사람과 상황을 보여 주고 있다.

ol상들을 본 시기

제 삼십년에

이제 우리는 네 가지 요점을 더 상세하게 살펴보자. 첫째는 년도와 달과 일자의 시기이다. 그 해는 제 삼십 년이었다. 제 삼십 년의 의미를 이해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연구해 본다면, 제 삼십년이란 에스겔 생애의 제 삼십년째를 뜻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당시 에스겔은 서른 살이었다. 민수기 4장2절과 3절, 역대 상 23장3절에 따르면 레위인 제사장은 삼십 세가 될 때 여호와를 섬기기 시작했다. 주 예수님도 역시 서른 살이 되셨을 때 사역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하셨다. 서른 살에 달한 제사장으로서 에스겔은 그의 제사장 직임을 시작할 자격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원칙을 본다. 즉 영적인 것들을 깨닫기 위해서는, 하늘에 속한 이상을 보기 위해서는 생명의 성숙이필요하다는 것이다. 서른 살이 됨으로써 모든 제사장들은 성숙되어 있었다. 이 나이에 에스겔도 성숙했다. 이 나이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성숙하셨다. 이것은 만일 우리가 이 책에 있는 이상들을 보고자 한다면 영적 생명에 있어서 어느 정도 성숙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이 책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갖게 되는 이유는 대부분이 생명에 있어서 매우 어리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말해서, 어떤이들은 겨우 다섯 살이다. 또 어떤이들은 열 두 살이고 어떤이들은 열 다섯 살일지 모르나 영적인 성숙에 있어서 서른 살에 달한 이들은 많지 않다. 어린애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책 안의 이상들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 이상들을 본 사람은 매우 성숙했었다. 그는 서른 살에 달했었다.

서른이란 숫자는 하나님의 건축에 관한 부분인 에스겔서 40장부터 48장에서도 쓰인다. 46장 22절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의 바깥 뜰은 네 구석의 뜰을 가졌는데 각각의 넓이(광)가 삼십 규빗이다. 이들 네 구석의 뜰은 사람들이 먹고 누리기 위한 제물을 제사장들이 준비하는 곳이다. 더욱이 40장 17절에서 성전의 바깥 뜰은 서른 개의 방을 가졌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러 함께 모일 때 그들은 이 서른 개의 방에서 풍성한 제물을 누렸다. 에스겔서 41장 6절은 또 다른 서른 개의 골방을 언급하고 있다. 이 골방들은 성전 둘레의 삼면(三面)에 있는데 각각 삼층으로 되어 있다. 각 충마다 서른 개의 골방이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골방들은 성전의 충만함 을 가리킨다.

이 모든 구절들을 한데 두고 볼 때 우리는 이런 것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삼십이란 수(數)가 그리스도를 준비하고, 그리스도를 다른이들에게 공급하고,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리고, 그리스도의 충만을 표현하는 것에 관계된 수임을 볼 수 있다. 성경에서 삼십이란 수가 지닌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의 성숙을 상징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누리고 당신이 누리도록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능력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를 그분의 모든 충만함으로 표현할 수 있는 수용 능력을 가리킨다. 에스겔이 이상들을 보았을 때 나이 서른이었는데, 이것은 그가 성숙한 사람임을 뜻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예비할 수 있었고, 다른이들이 누리도록 그리스도를 공급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성숙했으므로 그리스도의 모든 풍성을 그분의 충만함 가운데서 누릴 수 있었다. 삼십이란 수는 에스겔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반드시 영적인 생명에 있어서 성숙해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에 관한 이상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이들의 누림을 위해 양식을 마련할 수 있고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모든 풍성을 누릴 수 있으며 성전의 골방들, 즉 그리스도의 충만이 될 수 있다.

삼십이란 수는 에스겔서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다섯 곱하기 여섯과 십의 세 배로 이뤄진다. 주로 그것은 삼 곱하기 십으로 이뤄진다. 성경에서 열(10)은 언제나 넷 더하기 여섯이나 셋 더하기 일곱으로가 아니라 두 개의 다섯으로 구성된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열 처녀가 나온다. 다섯 처녀는 지혜롭고 다섯 처녀는 미련하다. 십계명의 경우, 다섯 계명은 한쪽 서판에 있고, 다섯 계명은 다른 서판에 있다. 다섯이란 수의 의미는 무엇인가? 다섯(5)은 당신에게 하나님을 더함으로써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책임을 상징한다. 네 개의 손가락 더하기 하나의 엄지를 생각해 보라. 이 다섯 손가락으로 당신은 어떤 것을 하는 책임을 감당할 수 있다. 넷이란 수는 피조물의 수이며, 하나라는 수는 창조주의 수이다.

피조물이 자기에게 더해진 창조주를 가질 때, 그는 책임을 감당할 수 있다. 이같이 당신은 열(10)이 다섯의 두 배로 구성된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더해진 하나님을 갖고 있는 피조물들임을 뜻한다. 그 목적은 우리가 책임을 감당할 수 있기 위한 것이다. 이 책임은 뒤에 나오는 장(章)들에서 보여진 것처럼 세 개의 층에 있다. 이 세 개의 충 또는 삼 충은 신격의 세 위격-아버지, 아들, 그 영-을 상징한다. 이처럼 삼십이란 수는 피조물들이 책임을 감당할 수 있기 위해서 그들에게 더해진 하나님을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누림을 위해 그리스도를 준비하고, 우리 자신을 위해 그리스도를 충만하게 누리고, 그리스도를 그분의 충만함 가운데서 표현하는 데 필요한 생명의 성숙이다. 거듭나기 전에 우리는 오직 넷이라는 수만 가진 피조물들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을 우리 안으로 영접하여 우리는 다섯이란 수가 되었다. 우리 모두는 삼일 하나님의 세 위격 안에서 우리 안으로 더해진 하나님을 가져야만 한다. 그렇게 더해짐으로써 우리는 삼십이란 수, 즉 성숙의 충만이 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삼십 세인 에스겔들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이상을 볼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누림을 위해 제물을 마련할 수 있고, 우리 자신을 위해 제물들의 모든 풍성을 누릴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충만하게 표현할 수 있다.

제 오년

에스겔은 때가 제 삼십 년이라고 말했을 뿐 아니라, 제 오년이라고 말했다. 제 삼십년은 그의 출생년도부터 계산된 것이고, 제 오년은 포로 된 해부터 계산된 것이다. 그들이 포로되어 잡혀간지 오 년이 흘렀다. 다섯은 넷 더하기 하나로서 피조물에 창조자가 더해진 것을 상징함을 기억하라. 왜 포로 된 지 첫 해나 둘째 해 혹은 세째 해에 이상이 임하지 않고 제 오년에 임했는가? 그 이유는 제 오년 때까지 사람들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른이 안 된 에스겔은 준비되지 않았었다. 만찬가지로, 백성들도 포로 되어 다섯 해를 지내기까지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었다.

제 오년에 관한 요점 한 가지가 더 있다. 즉 오 년 전에 에스겔은 스물 다섯이였고 아직 서른이 아니었다. 민수기 4장 2절, 3절은 모든 제사장들이 삼십이 되어서야 그들의 직임을 시작한다고 말해 준다. 그러나 민수기 8장 24절은, 모든 레위인들은 스물 다섯 살에 섬기기 시작한다고 일러준다. 겉으로 볼 때 성경에 모순이 있는 것 같다. 어떤 장은 그들이 스물 다섯 살에 섬기기 시작한다고 말하고, 또 어떤 같은 그들이 서른 살에 섬기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이것은 그들에게 오 년의 견습기가 필요했음을 가리킨다. 그들은 곧 바로 제사장봉사에 임할수 없었다. 그들은 오 년 동안 훈련받고 훈육되는 것이 필요했다. 포로 되기 시작할 때 에스겔은 스물 다섯 살이었다. 그는 방금 견습에 들어갔었다. 그는 배우는 자였다. 그는 견습 초기에는 이상들을 보지 못했으나, 견습 말기에 완전히 성숙했을 때 이상을 보았다. 이것은 이상을 받아들이는 데 생명의 성숙이 요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스겔이 이상을 보는 데는 삼십 세의 성숙이 필요했고, 사람들이 이상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성숙하기 위한 오 년이 필요했다. 이것은 영적인 일들에는 성숙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당신이 어릴 때에는 영적인 것들을 보거나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영적인 것들을 보고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취할 수 있기 위해 주님이 우리에게 생명의 성숙을 허락해 주시도록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장소

갈대아에서

이제 우리는 그가 이상들을 보았던 장소를 살펴보자. 그 장소는 좋은 곳이 아니었고, 갈대아인들의 땅이었다. 갈대아는 바벨이 시작된 곳이었다. 히브리어 「바벨」은 헬라어 「바벨론」과 동일한 단어이다. 그러므로 갈대아는 바로 바벨론이었다. 창세기 11장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탄이 하나님을 반역하기 위해 타락한 모든 사람들을 모은 곳이 바로 바벨이라는 것이다. 에스겔이 이상들을 본 곳도 바로 그 장소-사탄이 타락한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거스려 큰 반역을 일으켰던 곳-이었다. 그러나 할렐루야 ! 그곳을 또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분의 택한 백성을 불러내셨던 곳이기도 했다. 불행히도, 에스겔 시대에 그분의 택한 백성들이 대부분 포로가 되어 그곳으로 되돌아갔다. 그들의 포로 됨은 일종의 타락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고 나온 바로 그곳으로 굴러 떨어졌던 것이다.

질문을 하나 하겠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어디에 있는가? 당신은 오늘날의 기독교가 가나안 땅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갈대아인들의 땅에 있는가? 무어라고 대답할 것인가? 확실히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 인들이 좋은땅에 있지 않고 타락의 땅 안에 있다. 이런 이유로 에스겔서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좋은땅에 있지 않고 갈대아 땅에 있는 때인 오늘날의 상황에 들어맞는 것이다.

강가에서

에스겔이 이상들을 받았을 때, 그는 강가에 있었다. 이 책에는 두 강이 있다. 하나는 1장에 있고, 다른 강은 47장에 나온다. 그발 강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에게서 흘러 떠내려 보내었지만, 성전으로부터 흐르는 강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이끌었다. 당신은 오늘날에도 이 땅위에 여전히 이 두 강이 있음을 아는가? 한 강은 이 세상의 흐름이요, 풍조요 조류이다. 타락한세상으로부터 나오는 이 강은 사람들을 하나님에게서 떠내려 보낸다. 그러나 할렐루야! 이 땅 위에는 또 하나의 강이 있다. 이 강이 흐르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당신은 오늘날 어느 강가에 있는가? 당신은 그발 강가에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거처로부터 있다. 나오는 강가에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거처로부터 흐르는 생수의 강가에 있다고 말하지만, 이 시대의 풍조에 속한 무엇을 여전히 갖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은 아직도 오늘날 세상의 흐름 안에 있지는 않은가?

만일 당신이 여전히 오늘날 세상의 흐름 안에 있다면, 당신은 생수의 강가에 있지 않고 그발 강가에 있는 것이다. 당신은 가나안의 거룩한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갈대아인들의 땅에 있는 것이다. 오늘날 두 개의 강이 흐르고 있다. 하나는 이 세상에 속한 강이고, 다른 하나는 거룩한 땅의 강이다. 하나는 사람들을 하나님에게서 흘러 떠내려 보내는 강이요, 다른 하나는 사람들을 하나님에게 되돌리는 강이다. 하나는 하나님의 건축을 파괴하는 강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처소를 건축하는 강이다.

이상을 본 사람

이제 우리는 그 이상을 본 사람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에스겔은 어떤 종류의 사람이었는가? 첫째, 그는 제사장이었다. 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며 그 자신을 하나님과 연합시키면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사는 사람이다. 에스겔은 그러한 제사장이었다. 둘째로, 에스겔은 부시의 아들이었다. 부시(Buzi)란「경멸」혹은「멸시받는」이란 뜻이다. 에스겔은 사람들에게 멸시받은 선지자였다. 그는 자기의 사역에서 영광을 받지 못했다. 만일 오늘날 주의 회복 안에서 당신이 에스겔들 가운데 하나라면, 당신은 멸시받을 것이다. 어떤 영광이라도 얻으리라고 생각지 말라.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멸시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남들에게 멸시받는다 해도, 결코 실망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에스겔들이 되어야 한다. 당신은「에스겔」이란 단어의 뜻을 아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힘을 주신다』 혹은『전능하신 분이 너의 힘이다』를 의미한다. 아무리 사람들이 당신을 경멸한다 해도 당신은 반드시 강건케 되어야 한다. 더우기 여호와께서는 에스겔에게 말씀하시기를, 그의 얼굴을 그들의 얼굴보다 강하게 만들고, 그의 이마를 그들의 이마보다 더 강하게 만들겠다고 하셨다. 그의 이마는 철석( 鐵石)같이, 다이아몬드같이, 부싯돌같이 매우 단단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받았지만, 하나님에 의해 강건케 되었다(3 :8-9). 에스겔(Ezekiel)이란 이름은 접미사 「엘(el)」로 끝난다. 「엘(el)」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전능자」라는 뜻이다. 한편으로 그는 부시의 아들로서 남들에게 멸시받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에스겔」로서 하나님에 의해 강건케 되었다.

조건

하늘이 열림

이제 우리는 이상을 보기 위한 조건들을 볼 필요가 있다. 먼저 하늘이 열렸다. 이 땅 위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과 하나일 때마다 하늘이 그들에게 열릴 것이다. 하늘이 열린 것에 대해 성경이 최초로 언급한 것은, 야곱이 그의 형 에서를 피해 방랑하고 있을 때였다. 그날밤 그는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하늘이 그에게 열렸었다(창 28 : 11-17).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 많은 야곱을 땅 위의 교두보로 삼으시고자 한다는 것을 상징했다. 그럴 때 하늘이 땅을 향해 열릴 수 있었다. 주 예수님이 침례받으셨을 때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하나 된 사람이 땅 위에 있음을 선포했다(마 3 :16-17). 포로 된 땅에서도, 성숙하고 하나님과 하나 된 사람 에스겔이 있었으므로 하늘이 그에게 열렸다(겔 1 : 1). 오늘날에도 그 원칙은 동일하다. 우리에게 하늘이 열리는 것이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오늘날의 에스겔들이라면, 하늘이 우리에게 열릴 것이다.

이상을 받음

하늘이 열렸을 뿐만 아니라, 이상도 계시되었고 밝혀졌다. 이 메시지는 다른 책들에서 수집한 자료들로 구성한 설교가 아니다. 다른이들의 책에서 자료를 수집하여 그것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대로 전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전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가 본 것이어야만 한다. 그것은 열린 하늘에서 우리가 받은 이상이어야 한다. 내가 지금 당신에게 사역하고 있는 것은 이론이나 관념이나 교훈이나 교리나 신학교에서 배운 일종의 조직 신학이 아니다. 그보다 그것은 열린 하늘로부터 받은 하나의 이상이다.

특별한 말씀

더우기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했다. 우리에게는 평범한 말이 아닌 특별한 말씀이 필요하다. 그런 특별한 말씀을 얻기 위해서 성경 주석들에게 가지 말라. 심지어 뭣치만 니나 윗트니스 리의 책에도 가지 말라. 당신은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온 특별한 말씀을 가져야 한다. 에스겔에게는 하늘이 열렸고, 이상들이 임했고, 또한 특별한 말씀도 임했다.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 다음에는 무엇이 따르는가? 하나님의 손이 뒤따랐다. 만일 우리가 사역하는 것이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하나님의 손이 뒤따를 것이다. 하나님의 손은 항상 그분의 말씀하심에 후속된다. 그분은 말씀하시는 것마다 행하신다. 당신이 많이 말씀을 전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는 당신이 말하는 입만 가졌고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당신이 말하는 입을 가졌을지 모르나 당신에게는 당신이 말한 바를 이뤄낼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이 필요하다. 오, 오늘날 우리에게는 하늘이 열리는 것이 필요하다. 이상이 우리에게 임하는것이 필요하다. 말씀이 특별하게 임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손이 뒤따르는 것이 필요하다. 만일 내가 말하고 있지만 거룩한 손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헛된 말함일 것이므로, 당신은 그 말을 잊어버려야한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전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이라면 주의하기 바란다. 그 말씀을 건드리지 말라. 나는 작은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손은 작지 않다. 그분은 그분의 말씀하심을 좇아 역사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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